중정기념관(中正記念館)의 자유광장

타이페이

시먼(西門)

“타이완에 모인 사람들은 다 자기 나라에서 무언가를 잊기 위해 온거야.” 중정기념광장 옆, 실외로 트여있는 어느 바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일라나가 중얼거렸다. 대화는 어느새 아시아에 사는 외국인들에 대한 주제로 흘러가 있었다. 비록 그녀의 한마디는 췻김에 내뱉은 본인 연애사 타령이었을 테지만, 불과 한 달 후 병역의 의무를 다하러 끌려갈 내가 이 아름다운 남국의 섬에 도달한 이유와 공교롭게 맞아떨어졌다. 이른 저녁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잎 소리, 멀리서 들리는 차 경적소리, 친구들의 유쾌한 웃음, 일렁이는 거리의 불빛, 그리고 약간의 알콜 기운이 한데 섞인 한여름, 아니 한 가을밤의 꿈처럼 타이완에서의 둘째 날이 여물어가고 있었다. 그 날 저녁의 기분좋은 분위기가 바로 내 타이완 여행의 축소판이 아니였던가 싶다.

타이페이의 평범한 골목풍경

타이완에 도착했을 때 첫 인상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아시아의 여느 선진국 공항에서처럼 수하물을 찾고, 전광판을 보며 리무진 버스 승강장을 찾아가 시내로 향했다. (타오위안 공항에서 타이페이로 직행하는 전철이 아직 없다.)  공항 주변을 벗어나서야 한국의 풍경과 다른 점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특색없이 빽빽한 상가와 건물들, 좁은 골목, 바쁜 행인들은 한국의 여느 도시와 다를바가 없었지만, 무언가 좀더 파릇파릇하게 녹음이 우거졌다는 인상이 들었다. 건물마다 담쟁이 덩굴이 올라가있었고, 창가마다 철제 선반같은 공간에 꽃과 식물을 가득 올려놓고 키우고 있었는데, 어떻게보면 조금 낡고 오래된 느낌이었지만 자연의 생기로 가득한 것도 사실이었다. 초현실적이면서 약간 건조한 도쿄와 서울의 거리와의 차이는 여기서 나오는 듯 했다.

이번 타이완 여행이 나를 가장 설레게 한 점은 바로 생애 첫 카우치서핑(소위 소파族 여행)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카우치서핑은 간단히 말해 웹사이트에서 사전 연락을 한 생면부지 호스트의 집에 무료로 숙박하는 여행법.  서구의 합리주의적, 세계시민적 가치관에 입각해 시작된 이 여행법은 현재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각광을 받고있다. 타이페이 중앙역에서 MRT(타이완 지하철)을 갈아타고 동먼(東門)역에 내리자 호스트인 펠리페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원생인 펠리페의 아파트는 바로 그 근방이었는데, 중정기념관에서 도보로 불과 5분거리에 있는 최적의 여행 거점이었다. 그와 2명의 룸메이트들은 모두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자연스레 낮에는 홀로 여행, 밤에는 모여서 함께 노는 패턴이 형성됬다.

사당 앞에서 안무를 연습하는 사람들

투어가이드도, 잘 짜인 계획도 없이 나는 타이페이 시를 다리가 허락하는 한도 내 마음껏 돌아다녔다. 얼핏보면 한국과 비슷한 타이완도 조금만 눈여겨보니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예를 들어 종교활동은 타이페이 시민들의 삶 곳곳에 녹아들어있는 듯 했다. 롱산사(龍山寺)처럼 큰 절 뿐만이 아니라 바로 이 골목 귀퉁이, 저 건물 사이마다 작은 사당 같은 것이 숨어있고 사람들이 들어가 기도를 하거나 공물을  바치기도 했다. 어느 사당에는 옷을 맞춰 입은 한무리의 젊은이들이 탈과 호롱불 같은 것을 잔뜩 들고 징소리에 맞춰 모종의 안무를 연습하는데 그리 진기할 수가 없었다. 안쪽에는 검은 사향나무로 조각한 알 수 없는 신들의 형상에, 눈이 아플정도로 가득 수놓은 머리수건이며 장식이 빽빽히 달려있었다. 마치 일본에 여우나 지장보살 상이빨간 앞치마를 두른 듯이. 인류학적으로 대륙풍이 우세한 한국과는 달리, 일본이나 동남아 열도와 한 부류인 해양문화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은 듯했다. 롱산사에서는 사람들이 손을 모으고 몇 초간 기도를 한다음에 주사위인지 뭔지 모를 나무 조각같은 것을 바닥에 떨어뜨려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는 행동을 보았는데, 어떤 점술인 것 같지만 아직도 도무지 그 정체를 모르겠다. 아쉽게도 중국어가 짧아 감히 누군가에게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증폭하는 궁금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북경어 실력이 그렇게 무능할 수가 없었다.

반원전/핵 시위대

자유광장 앞에서 한참인 반(反)원전 시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플래카드에 반원전 이라고 한문으로 써있길래 그 목적을 대충 눈치챘을 뿐, 시위대 앞의 연설자가 뭐라고 소리치는지 한마디도 이해할 리가 없었다.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 폭발 이후 일본은 물론 타이완에서도 원자력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퍼지고 있는 듯했다. 한국인들은 타이완처럼 탈원전 여론이 크지 않은데 왜 그렇다고 보시나요? 탈원전을 할 경우 타이완의 주요 전력 보급원은 무엇일 될까요? 등등 질문거리가 화살처럼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내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을 뿐이었다. 정말 중국어를 배워야겠다.

경계인의 밤

저녁이 되서야 영어와 중국어가 유창(?)한 펠리페의 친구들과 함께 있어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런데 타이페이에 도착한 바로 그 날이 우연히도 룸메이트인 파블로의 생일과 겹쳤다. 이렇게 이 나라에 방금 내린 나는 다짜고짜 손에 이끌려 또다시 처음보는 사람들이 가득한 축하 장소에 와있었다. 다양한 국적과 목적, 그리고 서로 다른 기간동안 타이완을 찾은 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는데, 묘하게도 지금 생각해보면, 우린 영어로 말하는 파블로의 지인이라는 점 빼고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무리였다. 한 학기동안 중국어를 배우러 온 학생과 현지 친구들, 박사학위 후보생, 영어학원 교사들, 그리고 나처럼 카우치서핑하며 여행중인 또래 일본인 여성도 있었다. 우린 서로 일본어로 대화하면서 이 이상한 상황에 낄낄거렸다. 다시말해 그날 밤은 경계인(慶界人, expat)의 밤이었다. 서로 친해지자 우린 금방 양안(兩岸)관계ㅡ마침 그 날, 아리산(阿里山) 국립공원에서 중국 본토 관광객들이 현지인 남자를 집단 폭행했다는 뉴스가 떴다 ㅡ 에서부터 시작해 개인적인 표류기까지ㅡ”난 영국이 너무 병*같아서 여기에 왔지!” 영어교사란 작자가 고래고래 떠들었다ㅡ 별의별 이야기가 테이블 위로 오갔다.

바텐더와 종업원들까지도 친근하고 재밌었던 그날 밤, 술기운 오른 외국인들이 볼썽 사나웠는지 시비를 걸어온 이상한 젊은 남녀와 돌아오는 길에 들린 세븐일레븐에서 투닥거려야했다. 그것만 빼고는 유쾌하게 타이완 신고식을 톡톡히 한 느낌이었다.  경계인이란 어차피 현지인들과의 묘한 긴장감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 이상한 커플 따위는 금새 잊고 소파위에서 잠들었다.

유명한 야자대로(Royal Palm Boulevard)

다음날 점심시간에 맞춰 파블로가 재학중인 국립대만대(國立台湾大學, NTU) 구경을 시켜줬다. 동아시아의 명문 중 하나라고 자부하는 국립대만대(줄여서 “타이따”台大)는, 한때 일제가 세운 대북제국대학이 모체로서, 서울대의 전신이 경성제국대학이었던 것과 같은 유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면서도 서울대 언저리도 가본 적이 없는 내가 국립대만대 캠퍼스를 거닐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 나름 묘했다. 영화와 광고에서 익히 본 야자수 대로(Royal Palm Boulevard)와 붉은 벽돌이 아름다운 중앙도서관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곳은 대만대의 학생식당이었다. 부페식과 부스식이 적절히 혼용되어있고, 중화와 남국의 풍미가 섞인 타이완의 다채로운 식문화를싼 값에 만끽하는 값진 경험을 했다. 가격도 맛도 형편 없는 미국의 흔한 다이닝홀들은 정말 아시아의 대학들로부터 벤치마킹을 해야하지 않을까. 수업을 들은 것도,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한 것도 아니어서, 학교로서의 대만대의 브랜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자리는 안되지만, 여행자로서 본 대만대는 긍정적인 기억을 남겨줬다. 학생들은 대부분 영어가 유창했고 어느 건물에서든 친절했다. 특히 파블로를 비롯, 국제학생들의 존재감이 매우 크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얼마전 서울대 학부의 세계화/국제화가 많이 뒤떨어진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에 귀감이 되었다. 한 나라의 최고권위 교육기관의 덕목으로서 세계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사실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타이완 정도한테는 뒤지고 싶지 않아…”하는 괜한 분함이 일어서일까.

국립 고궁박물관

다음 목적지는 유명한 국립 고궁박물관이었다. 타이베이에서 약간 외각인 시린(士林)까지, 그곳에서도 버스로 15분 정도 가면 인적이 약간 드물고 숲이 울창한 산 위에 박물관이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며 서있었다. 장개석의 국민당이 중국에서 물러나면서 함께 가지고 왔다는 696,000 점의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그리 대단하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물론 60만점의 보물이 다 열람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한 건 아니고,  그저 유물들이 전시된 방법이라던가 전시관의 구조 등이 21세기 수준에 조금 뒤떨어진다는 느낌이 있어서였다. 예를 들어, 관광안내 팜플렛에서 그리 자랑해 마지 않던 국보 취옥백채(翠玉白菜), 즉  옥배추도 3층 어느 방에, 높낮이나 조명에 아무런 차별화도 없이, 얇은 유리상자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가까이 가서 보기 편하겠다 싶어 다가가는 순간, 본토 출신이 분명한 한 무리의 할머니 관광객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더니, 나 따위는 가볍게 제치고 옥배추를 포위해버렸다. 폭풍 가운데 섬 위에 놓인, 어린왕자의 장미인 마냥 가녀린 옥배추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할까 한순간 공포감까지 일었지만, 다행이 나이 125년 세월의 옥배추는 잘 버텨줬고, 중국 할머니들도 금세 관심을 잃었는지 우르르 다음 방으로 가버렸다.

고궁 박물관의 전시 자체는 꽤 실망이었지만, 내가 가장 인정하고 싶은 것은 박물관의 위치선정이다. 건물을 나와 광장만한 테라스로 나오자 파도치듯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시린의 언덕들 위로, 정말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에나 나올 듯한 새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넓게 펼쳐져있었다. 에메랄드 색 기와를 얹은 고궁 박물관이 이

명당에, 신선의 궁전인 마냥 서 있었다. 박물관을 내려와 시린 역 근처로 돌아왔을 땐 이미 저녁무렵이였고, 수업이 끝난

일라나를 불러 야시장을 돌아다녔다. 타이완의 야시장은 북적거리고, 약간 조잡하기도 한 것이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음식만은 한국보다 한 수 위라고 인정해야겠다. 우리는 내내 시끄러운 인파속에서 서로 목소리가 들리도록 한껏 핏대를 새워 대화를 하면서 양념한 소라, 닭꼬치 등을 즐겼다. 냄새가 고약해서 외국인들이 기피하는 쵸우또부(취두부,臭豆腐)도 비닐봉지 한가득 담아 걸어가면서 맛보았다. 확실히 튀김에서 기묘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맛만 나서 질겅질겅 먹고 있는 나를 일라나는 마치 범죄자 마냥 쳐다보았다.  물론 다리가 아파지자 허름한 어느 곳에서 타이완식 망고빙수를 먹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말이다.

쑨원 기념관과 타이페이101

 

다음날 아침 타이페이를 떠나 싱가포르에 갈 예정이어서 친구들이 집에서 저녁을 해주고 함께 밖에 나가서 시간을 보냈다. 파블로가 손수 고향인 온두라스 식 오믈렛을 요리했고, 식사 후 우린 유료 공용 자전거를 타고 중정 기념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마지막 날 밤을 즐겼다. 첫 날 Touch에서 과음했는지, 정작 호스트인 펠리페는 내내 끙끙거려 데리고 나올 수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소파에서 눈을 떴을 때 다들 이미 등교한 뒤였다. 여행가방에 대충 짐을 싸고,  햇살이 이글거리는 밖으로 다시 발을 내딛었다. 싱가포르행 비행기는 12시 출발이었고 아직 오전에 시간이 남았던 나는 꽤 최근까지 아시아 최고높이 건물이었던 타이페이101과 국부기념관을 보러 MRT에 탔다. 국부기념관은 장개석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 두 곳에서 모두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孫文)을 기리는 박물관 겸 다목적 공연관이었다. 깨끗하게 잘 정돈된 주변 경관이 타이완 사람들의 공경심을 잘 대변해주는 듯 했다.

링컨을 따라하는 쑨원

 

그러나 기념관 건물 자체는 사실 조악해 보였다. 콘크리트 기둥과 시멘트 타일이 주가 되어 80년대 분위기가 풍기는 이 건물은, 역시 아무런 감정도, 건축미도 느껴지지 않는 박스모양 국가기관 건물이 가득한 워싱턴 DC의 어느 구역을 생각나게 했다. 이 영혼없는 신전 가운데, DC에 링컨 대통령이 자기 신전에 앉아 있듯 쑨원 선생의 동상도 앉아있었다. 방문객들은 최대한 경건한 자세로 홀 안을 돌아보고 있었고, 한 시간마다 근위병 교대식이 있어 이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시관에는 쑨원이 살던 시절의 사진과 지도, 그리고 시청각자료들이 있었는데, 서세동점의 시절 파란만장했던 중국의 역사와 손문의 발자취를 다루고 있었다.

이를 둘러보고 난 소감은 사실, 손문은 현대 타이완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었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이미 일본에 합병됬었던 타이완을몇 번 방문해본 적 밖에 없었고, 실질적으로 자유중국과 공산중국으로 나뉜 현 상태를 바라지도, 상상하지도 않았던 듯 하다. (1925년에 사망했으니 일본의 패망이나 국공내전을 살아 보지도 못했다.)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에서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열세에 몰린 타이완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타이완에 의한 본토 회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현재에, 그리고 타이완의 젊은 세대는 ‘하나의 중국’ 이 아닌 독립된 타이완을 그리는 이제, 통일된 중국을 염원했던 쑨원을 이곳에서 모시는 것은 아이러니일 수도 있겠다. 많은 생각거리가 실타래처럼 엉켜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체 나는 길 건너 하얏트 호텔에서 출발하는 공항행 리무진을 타고 타이페이를 허둥지둥 떠났다. 해는 이미 중천에 걸려있던 것이다.  다음페이지 계속

Byunghun

Byunghun

Founder, editor-in-chi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