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정(倭政) 말에 학용품이 부족해서 학업이 힘들 때, 그 ‘톰보’ 라고 잘 빠진 연필을 여러 묶음 사들고 학교로 와 동생들한테 나눠주곤 했지.”

“아, 아카톰보(赤蜻蛉)요?”

“아니, 그건 고추잠자리고, 톰보라고, 잠자리 모양 상표가 있었다고. 하여간 참 섬세한 양반이었지”

생전 처음 말을 붙여본 고모할아버지가 추억하는 할아버지의 단편이었다. 사소한 이야기였지만, 직계 가족이 아니면서 할아버지와 같은 시대,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누군가의 추억이 왠지 신선했던 것 같다. 사실 부모님이나 고모, 삼촌들이 구전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험담은, 물론 각자의 시선에 따라 덧붙여지거나 누락되긴 했지만, 어쨌든 사실관계를 서로 보완해주는 내용이었기에 몇번이고 재탕해서 듣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크리스쳔 집안 출신인 할머니가 결혼식 날, 조상신의 신위(神位) 앞에서 절을 못하겠다고 눌러앉자 온 어르신들이 불쾌해 하던 와중, 증조부께서 넘어가자 하여 결혼이 성사됬다는 에피소드라던가, 부산 시청에서 공직생활을 하던 시절, 한문을 제대로 읽는 유일한 공무원이었던 할아버지가 서류조작을 찾아내 어느 사기꾼을 묵사발로 만들었다던가ㅡ 유독 아버지가 계속 이 사건을 즐겨 인용했다 ㅡ 하는 내용의 이야기들이었다.

젊을 적 그는 왠지 이런 모습이었을까. Studio Ghibli 「風立ちぬ」

이 집 저 집 친척들이 가끔 그에 대해 하는 단편적인 말을 주워들으면서, 나는 젊은 날의 할아버지를 막연히 상상해보곤 했다. 누군가가 그는 일제시대 때 교육받은 이 나라의 첫 측량기사였다고 하는데ㅡ 그런데 그 정도 이력이라면 측량기사 협회라던가 인명사전에도 이름이 등재되어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ㅡ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이미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호리코시 지로(堀越次郎) 비슷한 그런 것이었다. 조금은 큰 20년대스런 양복에, 빵모자와 안경을 쓰고, ‘톰보’연필이나 측량계를 한 손에 들고 있는 그런. 식민시대 이 나라에서 나름 학문과 기술을 배운 엘리트였으나, 현대사의 비극과 소용돌이속을 억척스래 헤쳐나가야만 한 그런 초인적 인물 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시대를 ‘억척스레 헤쳐나가야만 한’ 초인은 그가 아닌 할머니일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는, 지금도 그렇지만, 여성에게 그닥 친절한 곳이 아니니 말이다. 한번은 큰고모님 댁에 들려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국전쟁이 끝나고 부산에 살던 조부모님과 고모들의 어릴적이 나왔다.

“너네 할아버지는 공부를 잘해서 공무원 자리를 얻었지만, 그 당시엔 지금처럼 공무원이 대세가 아니었어. 오히려 집안을 먹여살린다고 너희 할머니가 사업도 하고 제일 분주하셨다.”

“그래요? 근데 쌀집인가 했는데, 하도 사람들한테 외상으로 꿔줘서 수완이 안좋아 망했다면서요?”

“아 그래, 물론 당시엔 모두 가난했고, 너희 할머니가 심성이 좋으니까 너도나도 값을 안치르고 쌀을 타다가 가게가 오래 못갔지. 지금처럼 뭐 MBA니 경영학같은 걸 공부했겠냐. 다만, 지금은 너희가 할머니를 좀 무시할런가 모르겠다만 사실 할머니가 머리가 괭장히 좋아. 장사 IQ가 돌아가는 분이셨지. 오히려 너희 할아버지나 큰아버지가 고집불통 학자 스타일어서, 떡-하니 앉아만 있는 그런 류였다고.”

“할머니 집안에는 보부상도 있고, 원래 장사를 했다지 아마.” 큰고모부도 거드셨다.

“그래, 쌀가게 말고도 금방, 그 뭐시냐, 당시 우리 동네엔 이북 쪽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살았는데, 원래 옛날엔 남한보다 북한 쪽이 공업이 더 발달되어 있었다고. 그래서 이북 출신에 옷감 만드는 방직공들도 많이 살았지. 여기서 할머니가 또 사업 아이디어를 낸거야. 옷감에다 자수를 놓는 가내 수공업을 시작한거야. 나 학교 다닐때만 해도 집 윗층에 여러명 고용해서 미싱기 돌리면서 이부자리라던가에 수놓곤 했지. 너희 할머니가 요즘식으로 말해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있는 여성이었다고.”

종교문제로 파탄날 뻔한 결혼식 에피소드도 그렇지만, 사실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들은 열악하고 살기 힘들던 시절은 물론, 지금에 와서도 어떻게 그녀가 꾸준히 자기 의지를 관철시켜왔는가가 주제라고 볼 수 있겠다. 유교적 교육과 지식인으로의 프라이드가 있는 할아버지의 가치관과는 또 다른, 좀 더 서민적이고 유연하면서, 세속의 권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할머니만의 스타일이 느껴지는 것이다.

한번은 할아버지 집에 오랜만에 들르니, 이제 나도 성인이 되어서 가계의 역사와 선조들에 대해 알아야하지 않겠냐며 나를 앉혀놓곤 할아버지께서 이것저것 알려주신 적이 있다. 시조와 본관, 유래 ,그리고 누가 몇대손인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조상이 누가 있는지ㅡ 사육신 중 한 명도 있댄다ㅡ 등을 읊는 동안 할머니가 과일을 가지고 방안에 들어오셨다. 마침 고향 하동의 어디에 가면 지금도 나라에서 하사한 열녀문이 있다고 말하고 계셨다. 이 대목에서 할머니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어느 집안이나 자랑거리는 있는법이지” 라고 넋두리를 하셨다.

할아버지가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지만 할머니는 무시하고 배를 깍으면서 또 넌지시 말하셨다.

“내는 정가(鄭家)다, 정가. 고것만 알면 됬다.

비슷한 분위기의 에피소드는 또 있다. 일어가 수준급이신 할아버지는 종종 나와 일어로 대화하면서, 어릴 적 배운 일본 격언이라던가 와카(和歌)를 읊곤 하셨는데, 그 모습을 보고있다가 할머니가 불쑥 끼어들어 “내가 배운건 ‘토케이가 난지데스까?(時計が何時ですか)’ 밖에 기억이 안나네!” 하며 짓궂게 방해하는 식이다. 결코 두 분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지만, 분명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이렇게 기저에 깔린 성격과 가치관 차이를 새삼 느껴왔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분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사랑과 정으로 이를 극복하고 의지하며 살아오셨으리라.

할아버지께서 암이 있다는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그동안 지병이 있던 분은 당뇨와 무릅으로 고생하던 할머니였지, 할아버지는 언제나 정정해보였기 때문이다. 수술을 받고 몇 달이 채 안되 할아버지는 소천(召天)하셨다. 부산 성모병원으로 가는 길, 수려한 경관의 도로 위로 택시를 타고 달리는 길 내내, 갑작스런 부고가 전혀 실감나지 않아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았다. 장례식장은 슬픔과 분주함, 그리움과 아련함,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에 대한 반가움과 처음 보는 조문객들에 대한 어색함이 섞여 있었고, 그 한 가운데 영정사진이 서있었다. 하얀 국화로 둘러싸인 그 앞에, 글자가 세로로 인쇄된, 할아버지의 오래된 성경책이 놓여있었다. 표지 안쪽에 끼워진 빛 바랜 종이에 할아버지를 장로로 안수한다는 내용이 한문으로 적혀있었다. 신이 난 아버지와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오랫동안 남들은 모르던, 그 만이 간직했던 성경을 발견한 듯 했다. 고모들도, 아버지도, 그 누구도 모르던 할아버지만의.

밤이 내리고 바쁜 그 날 일정이 끝나고 나서야, 조명을 줄이고 할아버지와 단 둘이 마주 볼 수 있었다. 못 다한 이야기, 내가 모르는 그의 삶, 다시 그 무릅 위에 앉아 들을 기회는 영영 오지 않는 것일까. 부모님이 모두 직장을 다니실 적, 서울의 할아버지 집 방에 앉아 같이 KBS 동물의 왕국을 보던 기억이 났다. 너무나 당연하게 항상 그곳에 계셨던, 아무렇지 않게 편하게 동물의 왕국이나 함께 볼 수 있던.

할아버지가 알려준 와카를 읊으며 그를 다시 추억해본다.

“봄 비 내릴 듯 하면
잠시 멈춰가지 않겠는가”

春雨、降るそうになれ
少し止まって行かぬか

하루사메 후루소오니나레
스코시토맛떼이카누까

Byunghun

Byunghun

Founder, editor-in-chief